우리나라 역사상 자주적이며 비폭력적이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화와 같이 일어났던3.1운동은 온 국민이 하나 되어 모두가 함께 일어났던 민족적 운동이고 거족적인 투쟁이다.
일제의 무력 침탈에 항거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독립만을 위해서 총, 칼에 대항했던 이 운동은 역사적으로 영원히 살아있는 우리 민족의 기상이다.
이러한 역사적 운동에 한때 충주에서는 3.1 운동에 불참했다 하여충주를 저평가 했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사실이다. 분명충주에서도 여러 차례 만세운동이 펼쳐졌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또한 충주사람으로서외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도 있다. 삼일운동 96주년을맞아 충주 삼일운동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편집자 주>
◇ 3.1운동의 역사적 배경
1910년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를 합병한 일본은 무력으로 갖은 횡포를다하였다. 이에 우리민족의 가슴에는 많은 울분이 쌓여만 갔다. 이럴즈음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윌슨 미국 대통령은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였다.
즉 세계 여러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식민지 지배를 받던 나라들이 독립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국내외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던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 졌다.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했고 대한인국민회는 미국정부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1919년 2월1일 만주와 러시아를 무대로 활동 중이던 조소앙, 박은식 등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은 최초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것이 무오독립선언서다. 1919년은 기미년이지만 이때 2월1일은 음력으로 아직 해가 바뀌지 않았으므로 무오 독립선언서가 된 것이다.
또한 일본 도쿄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각국 대사관과 조선 총독부, 일본 언론 등에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2.8 독립선언서다. 이2개의 독립선언서는 3월1일 국내에서 벌어지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3.1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였다. 1919년 1월21일건강하던 고종황제가 갑자기 서거한데다 일제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아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3월3일로 고종의 국상이 정해지자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이때를 맞춰 민족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고 3월1일 탑골공원에 군중들을 모아 놓고 민족 대표 29인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삼일운동의 불을 지폈다.
33인중 4인은 기독교인으로서선교활동중이거나 외국에 나가 있어 참석치 못한것이다. 이때 민족 대표29인은 직접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고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스스로 이를 경찰에 통고하여 스스로 체포 되었다.
또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것은 정재용씨다. 한번 불붙은민족운동은 점점 시차를 두고 지방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지도자 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시위운동을 주도했고 교통편의가 그리 좋지 않았던 때라 시위속도는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이때 우리 민족의 울분은 극에 달해 많은 국민이 적극적으로 삼일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 충주의 삼일운동
1919년 3월10일 충주 간이 농업학교 졸업기념 야유회가 범바위에서 열렸는데 여기 참여했던 교사 유흥식(유자명)과 학생 오언영 등이1919년 3월 15일 충주 장날을 이용하여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상의 농업학교 학생들과 보통학교 학생 그리고 예수교 측과 제휴하기로 하였으나 사전 발각으로 실패한 사건이다.
교사 유흥식(후일 유자명으로 개명)과오언영, 장천석, 유석보 등은 정모에게 발각되어 실패하였고서울 신학교에 재학하는 장양헌은 경고문을 교회 안에서 프린트하고 유석보가 협조하였으며 이를 최집사에 의해 각 처에 배포하였다.
또한 4월8일에는 칠금동권태은의 집에서 김종부 등과 함께 모의 충주 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 교사 김연순을 끌어들여 여학생들을 동원하여 함께 만세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또한 중국 상해에서 돌아온 김부원이 참가 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들은청주까지 도보로 압송되었는데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는 등 의기 양양 하였다 한다. 김종부는 자신의 장딴지를찔러 그 피로 태극기를 그리고 태극기 여백에 한국 독립에 대한 문항을 쓰게 하였다.
또한 유흥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의열단 창단에공헌하였고 영화 암살에도 거론되는 등 그의 활약이 대단한 것이었다.
또한 3월11일 충주면달천리에서 천도교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다 일제 헌병에게 제지당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주동자 홍종호와 김흥배가 체포되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3월12일에는수천 명의 군중이 읍내에 집결하여 시위 만세 운동을 전개 하였다. 이는 충북 최초로 알려진 3월19일 괴산 만세운동보다도 일주일이나 앞선 것이었다.
4월1일에는 신니면 신단마을의 윤인구가 3.1운동 충북 대표인 이범익, 윤우영(신니면 신청리 사람)등과 내통 충주지역 유학자 및 유지인 박로학, 조용구, 이익호, 한청안, 홍준식, 심상훈 등을 접촉 상해 임시 정부를 지원했다.
윤인구는 장남 윤주영을 이범익에게 보내 독립선언문을 가져오게 하고 신니면 유일한 사학인 용명서당 출신인 손승억, 단경옥, 이강렴, 이강호, 이희갑, 윤무영, 윤주영, 김은배, 손석흔, 한태억등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독립 단을 조직 신니면 용원 장날 만세 운동을 주창케 하였다. 신니면 용원장터 만세운동 주동자 8인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충주 헌병대로 압송됐다.
◇충주인으로 외지 삼일운동 주도한 독립운동가
- 신태동: 충주 노은면 연하리 사람으로 청주 농업학교재학 중 학생들 주도 만세 시위계획에 동참 경고문을 인쇄하였다.
- 정태영: 삼일 운동시 서울 시위군중이 보신각을 지날 때 보신각종을 울려 독립의지를 고취시킴 가금면 가흥리 사람
- 김의현: 수안보면 화천리사람 4월1일 괴산 장연면 만세 운동 주도 고종장례식 참여할 봉도단 가입
- 이백하: 충주중교사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주도 유관순,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이순구, 조인원등과 함께 함 은퇴 후 충주에서 거주 아들 은창은 충원교 교사로 정년 퇴임
- 어윤희: 소태면 덕은리사람 개성만세 운동에 참여 독립선언서 배포하고 시위대를 끌고 만세운동을 주도함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도 옥중 투쟁을 계속 1919년 12월 옥중 만세 시위투쟁 전개 1920년 3.1운동 1주년을맞아 유관순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1주면 만세 운동 감행
- 최봉기: 살미면 설운리사람 간이농업학교 졸업 야유회 때 충주 장날 만세 운동 계획에 참여 옥고를 치름 문경 등지에서 자금을 모으며 독립활동
- 추성렬: 충주면 읍내리사람 4.1일 음성군 소이면 한천시장 독립만세 운동 주도 태극기 제작
- 정낙윤: 노은면 출신 3.1 만세 운동 후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 특별 단원으로 활약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태사부 참사로 활동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 입국 활동 하던 중 체포됨
이처럼 충주에서의 삼일운동은 일본군의 강력한 감시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유학자,종교인, 학생, 농민, 여인 할 것 없이 모두가 합심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 했고 사전 발각으로 계획에 그친 사건이나 감시 체제로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독립 운동가들이 외지로 나가 독립운동을 펼치는 등 역사 이래로 국가에 충성하고 외세 침입에 적극 대응하여 국가에 공헌함이큰 충주인의 기개와 자존심을 세운 여러 정황들이 드러난 것에 대하여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더욱이 충주 삼일 만세 운동을 뿌리부터 재조명 하겠다는 충주삼일 운동 기념사업회의 앞으로 활동에 기대하는 바크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차로서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에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서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로시작하는 기미 독립선언문 우리의 기미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세워준 우리 역사에 커다란 지침이요 지표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충주의 역사 속에서 삼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오명은 깨끗이 씻을 때가 된 것이다.
끝으로삼일 운동 당시 투쟁가를 소개한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의 독립성, 십년을 참고 참아 인제 터졌네뼈도 조선, 피도 조선, 이피, 이뼈는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것일세”
비폭력으로 일제에 대항한 3.1운동은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체포 46,948명의 인명 피해와 민가 715호 교회 47개소 학교 그곳이 불에 탔다는 당시 피해 상황 통계이나 실제 피해자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적 치욕인 일제의만행을….